1990년대까지만 해도 선거 때만 되면 중남미가 단골로 등장했다. 당시 상당수 중남미 국가는 군부독재체제 아래에서 정치·사회 혼란과 경제 위기를 겪고 있었다. 국민은 희망을 잃고 가난에 시달렸다. 정부는 외국에서 꾼 돈으로 각종 선심정책을 펴면서 불만을 달래려 했다. 

 

당시 집권당은 중남미 혼란에 초점을 맞췄다. 그들처럼 되지 않으려면 안정 의석이 필요하다며 표를 부탁했다. 반면 야당은 권위주의 체제에 주목했다. 그들처럼 민주주의가 억압받지 않으려면 자신들에게 투표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랬던 남미가 이젠 확 바뀌었다. 그 중심에는 브라질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전 대통령(2003~2010년 재임)이 있다. 한국·브라질 소사이어티(KOBRAS) 28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성공한 지도자들의 정치리더십: 퇴임 시 80% 지지율의 비밀’ 정책 세미나를 열고 룰라의 성공사례를 되새김질했다. 이념에 얽매이지 않고 국민의 대통령 역할에 충실했던 그는 퇴임 당시 87%라는 놀라운 지지율을 기록했다. 발제자인 임두빈 부산외대 교수는 “룰라가 집권 뒤 국가 시스템을 포용적으로 개혁한 것이 성공 비결”이라고 지적했다. 실용적 경제정책과 동시에 대국민 소통, 빈곤층에 대한 포용을 강화하면서 높은 지지를 얻었다는 것이다.

 

선반공 출신의 노동운동가였던 룰라는 취임 뒤 좌파이념보다 경제안정을 우선시했다. 전임 보수정권의 시장주의 경제정책을 계속 추진했으며 사회보장제도를 개혁했다. 그 결과 브라질은 2010 7%대의 경제성장을 이뤘으며 국내총생산(GDP)은 세계 6위까지 올랐다. 이를 바탕으로 중산층을 40% 늘렸고 3000만 명을 빈곤층에서 탈출시켰다. 선별적 복지정책으로 균형재정도 이뤘다. 금융·재정 분야 책임자로 야당 인사를 과감히 등용하는 통 큰 정치도 한몫했다. 이를 통해 진보는 보수의 시장경제정책을 인정했고 보수는 진보가 집권하면 퍼주기식 선심복지로 경제를 거덜 낼 것이라는 선입견을 버렸다.

 

룰라의 성공은 이제는 이념보다 지도자의 비전과 국정운영 철학이 우선시되는 시대임을 일깨워준다. 그런데 이제 20일도 안 남은 한국의 대통령 선거는 여러모로 우려를 자아낸다. 

우선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나 민주당의 문재인 후보는 내세운 성향과는 달리 공약에선 별 차이가 없다. 시중에 한창 회자되는 ‘누가 돼도’ 시리즈를 보면 양자의 공약수렴 현상이 확연하다. 지금까지의 발표와 발언을 보면 누가 대통령이 돼도 대기업 규제 강화, 고위공직자 지역안배, 대북대화, 검찰 대수술 정책을 시행할 것이다. 무상보육, 고교 무상교육, 의료비 국가부담 증가를 비롯한 복지는 누가 돼도 늘리게 된다. 사실 일부 안보 관련 논란을 제외하면 유력 후보 간 공약에는 특별한 쟁점도, 뚜렷한 차이도 별로 없다. 국정운영을 생각하지 않고 당장 득표에 도움이 되는 인기공약을 백화점식으로 서로 베끼다 보니 벌어진 일이다.
 

게다가 후보들은 집권 뒤 어떤 비전과 철학으로 국정을 운영할 것인지도 아직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이념적 프레임을 앞세워 상대가 집권하면 나라가 흔들리고 국민은 불행해질 것이라는 네거티브 구호를 외치기에 바쁘다. 시대착오적인 이념 대결이다. 박근혜-문재인 간의 대결이 되어야 할 대선이 일시 박정희-노무현 대결로 비화한 데는 이 같은 이유가 상당히 작용했을 것이다. 

 

이런 선거는 유권자와 후보 모두가 손해다. 이념 프레임에 빠지지 않은 유권자는 후보들이 나라를 어떤 쪽으로, 어떻게 이끌고 가겠다는 굵직한 목표도 방법론도 알지 못한 채 몇 가지 선심성 좁쌀 공약만 보고 투표하게 생겼다. 후보는 후보대로 당선된 뒤 자질구레한 공약을 챙기느라 제대로 큰 정치 한번 해보지 못하고 임기를 마칠 수도 있다. 

 

사실 대선은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도 그 못지않게 소중하다. 유권자들이 한바탕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고 앞으로의 기대와 희망을 재충전할 수 있기 때문에 국민적 축제 성격이 있다. 선거를 잘 치러야 집권 뒤 국정운영도 지지를 받게 마련이다. 후보들은 상처만 남을 뿐인 이념 프레임 선거를 당장 중단해야 한다.


[Source : [서소문 포럼] 박근혜와 문재인, 다른 게 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