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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브라질 군부독재
vs.
한국 군부독재
,
운명은 왜 엇갈렸나
[
백년포럼
] 87
년 민주화 세력의 실패와 새로운 정치의 모색
③
김상준 경희대학교 교수
다음은 오는
17
일 열리는 세 번째
\'
백년포럼
\'
에서 발표될 김상준 경희대 교수의 발제문
\"
공존 체제
, \'
다른 백년
\'
의 세계상
: 87
년 민주화 세력의 실패와 새로운 정치의 모색
\"
이다
.
김 교수는 냉전 종식은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최종적 승리가 아니라
\"16
세기에 시작되어 점차 세계 전체로 퍼져나간 장기 유럽내전이 이윽고 종식된 것
\"
으로 앞으로
\"
세계는 각 문명과 체제와 사상의 공존 체제로 나아가야 한다
\"
고 강조한다
.
그에 따르면 냉전의 종식은
\"
자본주의
-
사회주의라는 개념 자체와 그 양자의 대립구도
,
좌
-
우
,
그와 연동된 진보
-
보수
,
또 유럽내전의 글로벌한 결과물인 서구
-
비서구의 차별적
·
대립적 문명관
,
이 모든 게 이제 시효 만료가 되었음
\"
을 의미한다
.
그러나 한국의 정치세력은 분단체제와 냉전체제라는 시효가 지난 프레임에 갇힘으로써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열지 못했다
.
그는
\"\'
분단체제
\'
란
\'
분단체제 극복
\'
을 소리 높여 강조할수록
\'
분단체제
\'
의 구속력이 강해지는 체제
\"
라면서
\"
분단체제를 내려놓고 공존체제를 내세울 때
, \'
다른 백년
\'
의 프로그램이 열린다
\"
고 말한다
. \"\'
분단체제
\' \'
분단체제 극복
\'
프레임
,
즉
\'
냉전체제
\'
와
\'
냉전체제 민주화 운동
\'
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
새로운 백년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다
.
김상준 교수의 발제문을
4
회로 걸쳐 게재한다
.
\'
백년포럼
\'
은
17
일 오후
7
시
30
분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에서 열리며
,
조성주 정의당 미래정치센터 소장이 토론자로 참여한다
.
관심 있는 시민들의 많은 참여를 바란다
.
5.
지난
30
년을 다시 복기해보다
이러한 지각변동은
1970
년대 말
, 1980
년대 초부터 서서히 진행되기 시작했다
.
우리가 통상
\'
신자유주의
\'
라고 부르는 현상이 그러한 지각변동의 징후였다
.
한국의
\'
부마 항쟁
\'
과
\'
광주 항쟁
\'
은 그 징후의 다른 쪽 면이었다
. \'
긴 유럽내전
\'
이 마지막 습곡운동을 일으키고 있는 세계상황에서 벌어진 일들이었다
. \'
신자유주의
\'
란 그것을 더 연장해보려고 했던 몸부림이었고
,
한국에서 벌어진 항쟁들은 그 상황의 높은 압력이 만들어낸 파열들이었다
.
한국에서 신자유주의 또는
\'
세계화
\'
의 초기 현상은
5
공화국 때부터
\'
자유화
\' \'
시장개방
\'
을 내세우며 이미 시작되었다
.
이것이 노태우 정부의
\'
북방정책
\'
을 경유해
,
김영삼 정부의
\'
세계화
\',
그리고 그 결과인 걷잡을 수 없었던
IMF
사태로 이어졌다
.
아다시피
,
그 이후 어느 정부도 그 심각했던 후과를 벗어나거나 돌이키지 못했다
.
김대중
-
노무현 정부는 그 추세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문제의식이 어느 정도 있었으나 돌이키기에는 역부족이었고
(
결국 그 추세에 밀려 떠내려 가버린 셈이다
),
이명박
-
박근혜 정부는 오히려 그 추세를 더욱 가속화시키고자 했다
.
한국에서
1980
년대 내내 이뤄졌던 전두환 정권에 대한 저항
,
그리고 그 결과인
1987
년
6
월 항쟁 역시 그 흐름 위에서 다시 읽어야 한다
. \'
긴 유럽내전의 세계체제
\'
가 자신을 연장하기 위해 일으켰던 습곡운동은 일단 소련
-
동구권 붕괴라는 스펙터클로
,
그 결과 생성된 미국 일극주의로
\'
성공리에
\'
마무리되는 것처럼 보였다
.
그러나 그것은 채
10
년이 못가는
,
막간 소극이었고
,
큰 그림 속의 액자와 같은 것이었다
.
동구권 붕괴 후의 실제 전체 세계상황은 오히려 일극주의의 반대물인 다극주의가 거대하게 떠오르고 있는 것이었다
. 9·11
이 터졌을 때
,
이라크 전쟁에서 미국과 유럽 사이에 균열이 생겼을 때
,
이는 이미 분명해졌다
.
당시 중국이 과거와 다른 모습으로 부상하고 있었고
,
곧이어 남미가 떠올랐다
.
신자유주의의 시작을 상징하는 것이 영국에서 마거릿 대처와 미국에서 로널드 레이건의 집권이었다면
,
그 석양을 상징하는 것은
2008
년 미국금융 위기였다
.
이어
2010
년 중국이 세계
GDP 2
위
,
인도가
4
위로 부상했고
, 2011
년에는 브라질이
7
위로 떠올랐다
.
국가별 실제 경제상황은
GDP
를 실질구매력으로 환산한
PPP (purchasing power parity)
가 더 유용한데
,
이
GDP-PPP
기준으로
2014
년
IMF
통계를 보면
,
아래와 같다
. 10
년 전
, 20
년 전
, 30
년 전과 비교해 보라
.
상전벽해의 변화는 이렇게 진행 중이다
.
큰 추세를 이렇게 읽으면서 다시 돌이켜 볼 때
,
한국의
1987
년 민주화 항쟁이 요청하고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던가
? \'
긴 유럽내전
\'
이 산출했던 여러 대립적 칸막이들이 차례로 무너지고 있는 상황 속에서
(
앞서 말한 세 가지 차원의
)
공존의 원칙을 세우고 지켜갈 수 있는 체제로 신속히 전환하는 것이었다
.
이 공존의 가치를 지탱할 수 있는 축은
\'
공공성
\'
으로 집약할 수 있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
지구화
,
자유화의 거센 바람을 사회 여러 분야에서 공공성의 기준 아래 조절하여 수용하면서 최저수혜층에 불이익이 되지 않는 방식으로
(
존 롤스의
\'
정의의 원칙
\')
체제를 재구성하는 길이었다
.
진정으로 민주적이고 공공적인 강한 정부가 필요했다
.
그럴 수 있는 힘은 존재했다
. 1987
년 민주화 세력이 그것이다
. 1987
년 대선에서 야권이 분열되지 않고 집권했다면
,
그 정부의 성격과 역량은 당시 격동기에 요청되었던 조절 중심의 역할을 수행할만한 것이었다
.
그러나 분열됨으로써
1987
년
6
월 항쟁 주도 세력의 힘은 실제 크기보다 오히려 상쇄되어 후퇴했다
.
진화가 아닌 퇴화였다
.
그렇듯 첫 단추가 잘못 꿰어지면서
\'
북방정책
\' \'
세계화
\' \'IMF\' \'
양극화
-
청년실업
\' \'
기업사회화
\' \'
투기사회화
\' \'
속물사회화
\' \'
일베사회화
\'
급기야 오늘날에는 과거 독재의 재평가와 유신의 부활까지 운위되는 상황으로 미끄러져 왔다
.
비슷한 시기 비슷한 사정에서 출발했던 브라질 민주화 과정과 비교해 보면
,
그
30
년 간의 커다란 차이에 놀라게 된다
.
박정희 정권과 비슷하게
1960~70
년대 공포통치를 했던 브라질 군부독재 세력은 지난
30
년 동안 형체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약화되고 산산이 흩어졌다
.
반면
1987
년 이후 한국은 오히려 거꾸로였다
.
군부독재 세력인 민정당
,
민자당
,
신한국당
,
한나라당
,
새누리당이 그
30
년 동안 늘 주도권을 행사했다
.
<
브라질과 한국
,
민주화 과정의 차이
>
1980
년대 브라질 민주화의 특징은 군사정부가 초기부터 정국 흐름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는 점에 있다
.
치밀한 장기 민정이양 플랜을 세웠음에도 그러했다
. 1985
년 첫 민정이양 선거에서부터 제
1
야당인
PMDB(
브라질민주운동당
)
에 패배했던 것이다
.
이후
1990
년대를 거쳐
2003
년 이후
PT
당의 룰라 집권기에 이르면 구 보수세력은 자신의 군사 정권의 뿌리를 스스로 부정하고
,
자신을 미국 민주당과 같은
\'
진보적
\'
성격의 정당이라고 포장함으로써만 간신히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되는 소수 야당 세력으로 전락했다
.
오히려 구 야당이 주도세력이 되어 거꾸로 이렇듯 왜소화된 구세력을 나름의 목적을 위해 나름의 방식으로 이용한다
.
카르도수의
PSDB(
브라질사회민주당
)
가 대선과 총선에서 그랬고
, 2002
년 이후 대선
·
총선에서는
PT
도 그렇게 했다
.
이러한 과정 전반을 보면 한국 민주화 과정과 너무도 큰 차이가 있다
. 1987
년 이후 한국은 군부독재 세력과 야당 세력의 관계가 거꾸로 작동했다
.
군부독재 세력인 민정당
,
민자당
,
한나라당이 늘 주도권을 행사했다
.
오늘날까지도 그렇다
.
그 차이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
신생 정당인
PT
가
1980
년 출범 시부터
PMDB
에 다음가는 강력한 제
2
야당으로 인정되었다는 점
,
그리고
1985
년 민정이양 선거 시 제
1
야당인
PMDB
가 분열되지 않았다는 점이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
이런 상태였기 때문에
PMDB
는
1985
년의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
따라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 1980
년대 초
,
독립정당
PT
의 출범에 확고한 중지
(
衆智
)
를 모았던 범사회운동 세력도
, PMDB
에 당분간 충실했던 카르도수를 비롯한
PMDB
좌파도 브라질의 장기적 민주화에 긍정적으로 기여했다고
.
오늘날 브라질에서
PT
와
PSDB
는 맹렬한 라이벌 관계이지만
,
한국 민주화의 지난 경험에서 비추어 볼 때
,
이 양자의 라이벌 관계는 오히려 부러운 점이 있다
.
군사독재 세력을 완전히 제압한 민주 양당의 경쟁관계라고 보아줄 점이 있다
.
반면 한국은 아직도 군사독재 잔재 세력이 정치판의 최대주주다
. (<
진화하는 민주주의
>, 163~165p)
어디서 이런 차이가 생긴 것일까
.
역량
,
배경
,
역사의 차이를 솔직히 인정해야 할 것 같다
.
지금 부
(
富
)
의 크기를 가지고 남미를 내려다보는 것은 속 빈 졸부의식에 불과하다
.
브라질만이 아니라
,
거의 모든 남미 나라들은
19
세기 초반부터 시작되어 면면히 이어져온 자랑스런 독립과 자존의 서사
(
敍事
),
역사를 가지고 있다
.
독재자들이 많았지만 그와 맞서 싸운 역사 역시 대단했다
. 21
세기 들어 브라질만이 아니라 남미 전역에 속속 진보 정부가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은 남미 민주세력의 원숙한 정치적 경험의 역사적 부피에서 비롯되었다
.
그만큼 우리는
1987
년 이후
30
년의 경험을 더욱 냉철하고 뼈아프게 반성할 필요가 있다
.
6.
공존과 평화의 길
최근
\'
국정교과서
\'
파동은 뜻밖에 대한민국의 정치판도에서 매우 중요한 비밀을 하나 노출했다
.
대한민국의 의식지형에서
90%
와
10%
의 대립선이 어디에 그어져 있는지를 누군가
\'
실수로
\'
그만 자백해버린 것이다
.
그 핵심은 문명관의 차이에 있다
. \'
공존의 문명관
\'
과
\'
냉전의 문명관
\'
의 차이다
.
냉전의 문명관은
\"
오직 탈아입구의 길
,
서구화의 길
,
바다 문명의 길
,
반공의 길
,
친미의 길
,
친일의 길을 통해서만 번영할 수 있다
\"
고 굳게 믿는다
(
아래 박스 참고
).
과거 일본이 걸었던 탈아입구란 우리 자신이 가장 큰 피해자 중의 하나가 되었던 일본의 아시아 침략의 길이었다
.
잘 알려져 있듯
,
국정교과서 주도세력은 우리의 과거 식민지 경험을 재앙이 아닌 축복으로 본다
.
그들은 서양과 동양
,
바다문명과 대륙문명이 공존을 통해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게 되었음을 믿지 않는다
.
오직 반공
,
오직 친미
,
오직 친일만이 살 길이라는 생각이 너무나도 낡아빠진 옛이야기라는 것을
,
놀랍게도 여전히 믿지 않는다
.
지금 세계가 남북이
,
미중이
,
동서가 공존하는 세계로 가고 있음을 굳이 부인하고 부정하고 싶어 한다
.
바로 그렇게 생각하는 세력이
10%
요
,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90%
라고
,
이번
\'
국정교과서
\'
사태를 통해 바로 그 사람들 스스로 자백한 셈이다
.
대한민국의
\'
공존파
\'
정치 세력이 눈여겨 볼 대목이 아닐 수 없다
.
<
공존의 길과 대립의 길
>
20
세기는 그 전반은 제국주의 전쟁으로
,
후반은 동서냉전으로 얼룩진 세기였다
.
동아시아
,
그 중에서도 특히 한반도는
20
세기의 상처를 가장 크게 받았던 곳이다
.
그러한
20
세기의 상처투성이의 사유법 안에서 한국과 일본은 생존자
(survivor)
였고
,
북한과 중국은 패배자
(loser)
였다는 논리가 생겼다
.
이 논리는 생존과 패배의 구분선을 서구화와 비서구화로 나눈다
.
탈아입구
(
脫亞入歐
)
의 논리다
.
과거의 수렁에 빠져 탈아입구를 이루지 못했던 중국
,
그리고 그 길을 따랐던 북한은 패배자가 되었고
,
아시아라는 수렁을 빠져나와 과감히 새 길을 간 일본
,
그리고 그 길을 따랐던 한국은 생존자가 되었다는 논리다
. (…)
그리하여 한반도의 일제 식민지 경험도
,
한국의 대미 종속의 역사도
,
그것이 아무리 비참하고 부끄러웠다 하더라도
,
중국과 북한의 실패에 대비해 보면 오히려 축복이요 영광이었다고 당당히 말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
이런 시각에서 보면
,
탈아입구의 편에 서지 않은 중국과 북한과의 거리를 멀리 할수록
,
그들과의 대립을 날카롭게 할수록 항상 무조건 옳고 좋다고 하는 논리가 성립한다
.
또한 이러한 사고법에서는 북중과의 대립격화는 미일과의 결속강화와 항상 동의어가 된다
.
제로섬이다
.
이쪽이 커지면 저쪽이 작아지고
,
저쪽이 커지면 이쪽이 작아진다고 하는 단세포적 사고법이다
.
대한민국은 오직 탈아입구의 길
,
서구화의 길
,
바다문명의 길
,
반공의 길
,
친미의 길
,
친일의 길을 통해서만 번영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
.
이 길에서 한 치라도 벗어남은 몰락이다
.
여러 경로의 병립과 배합의 가능성은 이러한 완고한 사고체계에 들어설 자리가 없다
.
이렇게 생각하기에 탈아입구의 편에 서지 않은 아시아의 부상
(
浮上
)
은 오직 외면과 거부와 부정의 대상이 될 뿐이다
. (…)
이제 탈아입구의 주체가 아닌
,
아시아의 아시아라는 주체가 오랜 망각과 억눌림의 세월을 딛고 새롭게 일어서고 있다는 사실을 다만 불길하기만 한 전조로 느낄 뿐이다
.
지구적 문명 재편의 가능성 이야기가 나오면 이를 그저 부정하고만 싶어한다
.
뛰어봐야 벼룩이다
.
결국 변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믿고 싶어 한다
.
어디서 이런 심리가 나오는가
?
변화가 두렵기 때문이다
.
그저 기득권에만 안주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
이러한 심리는 너무나도 명백한 변화의 징후를 굳이 외면하려고만 한다
.
그저 철 지난
20
세기 냉전불패의 공식을 여전히 신주단지 모시듯 숭배할 뿐이다
.
중국과 북한 체제에 문제가 있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
중국 문화혁명기의 혼란이나 북한의 장기 대기근의 편력 그리고 삼대세습 등의 현상은 이들 체제에 대해 커다란 실망감을 주었다
.
냉전논리는 이러한 실패들을 자기근거로 삼았다
.
그러나 상대가 처참한 실패를 계속해야만 비로소 자신의 정당성이 확증되는 논리란 매우 불안정한 것이다
.
이러한 논리를 가장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 이제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게 된 중국의 급부상이다
.
실패해야 할 중국이 오히려 성공을 거듭하고
,
급기야 세계정세의 판도를 변경시킬 만큼 큰 힘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완강한 냉전논리를 근본에서 흔들어 놓고 있다
.
중국 역시 비로소 중국 자신의 길을 버리고 탈아입구의 길로 나선 것인가
?
중국의 실상을 잘 알게 될수록 사정이 그와 다름을 알게 된다
.
서구의 길의 모방만으로 결코 환원되지 않는 중국 고유의 발전 기반과 경로가 있다
(
이는 베트남 역시 마찬가지다
).
탈아입구와 같은 식의 아시아 버리기
,
중국 버리기
,
통째로 서구 따라하기와는 매우 다르다
.
이 속에서 중국의 역사는 오히려 새롭게 다시 조명되고 있다
. (…)
거듭 강조하거니와
, 20
세기식 사고방식을 벗어나고 넘어서야 한다
. 20
세기에 동서냉전 구도보다 더 뿌리 깊었던 것은 서구
(the West)
대 비서구
(the non-West),
또는 널리 쓰였던 다른 말로
,
서구 대 서구가 아닌 나머지
(the Rest)
라는 이원구조였다
.
우월과 열등
,
성공과 패배
,
흑과 백
,
선과 악의 이항대립구조
,
절대적인 서열체제였다
.
한번 만들어진 가치 패턴
,
사고 패턴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
그러나
1990
년대 동구권 붕괴로 냉전구도의 축이 우선 무너졌다
.
그와 거의 동시에 서구 대 비서구라는 이원구도 역시 밑바탕에서부터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 21
세기 징후의 진정한 시작은 서구 대 비서구의 시간 서열 체제의 첨단에 서있던 월가의 금융권력과 아프간 이라크 침공을 주도한 네오콘 일극주의가 동시에 크게 흔들렸다는 사실에 있다
. 2009
년
G20
회의 이후 의장인 영국총리 고든 브라운이 워싱턴 컨센서스
,
신자유주의는 끝났다고 선언했지만
,
이미 그러한 선언 이전에 종언을 고한 상태였다
.
이로써 순수한 사회주의
-
공산주의만이 아니라 순수한 자본주의라는 생각 역시 근거를 잃었다
.
역사 속에 그러한 것은 존재하지 않았고
,
이를 시도했던 실험들은 모두 실패했다
.
이러한 전제 위에서 인류 문명의 지구적 재편이 이미 활발하게 작동 중이다
.
동아시아권의 도약만이 아니다
.
앞으로 십몇년 안에 남미와 이슬람권이 크게 환골탈태하여 부상할 것이고
,
힌두권의 진출이 두드러질 것이다
. 19
세기 이래 영원한 질서처럼 보였던 서구 대 비서구의 일극
(
一極
)
적 서열구도는 이러한 격변 속에서 다문명의 비서열적 공존
,
동등한 관계정립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
따라서 진정한 상호존중에 기초한 공존과 번영의 길을 찾지 않을 수 없다
.
19
세기
20
세기 동아시아에서 탈아입구의 길은 분명 상대적 우위를 누렸다
.
이 길을 주도한 일본 내부에서 그 경로에 대한 날카로운 자기비판이 있었고
,
한반도가 그 방향으로의 진출의 일차적이고 가장 큰 피해자가 되었던 역사가 있음에도 그렇다
.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고 흥남철수에서 살아남은 한국과
,
한국전쟁 특수
(
特需
)
의 바람 위에서 재기의 기회를 잡은 일본은 세계냉전체제의 동아시아 첨병의 역할로 서서히 그 국제적 위상을 높여 갈 수 있었다
.
그러나 이 기간 일본인과 한국인이 오직 철저한 경제적 동물이 됨으로서만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
부단히 자신의 영혼을 단련하고
,
문명적 인간
,
민주적 시민으로서의 책무 역시 추구했다
.
이제 대한민국 사람들이 세계 앞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자랑할 수 있는 진정한 성취와 자산은 단순히 경제발전이 아니라 오히려 민주화요 여전히 강하고 진취적인 시민적 에너지다
.
한국을 잘 알고 사랑하는 많은 외국인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
일본의 경우에도 헌법 제
9
조의 평화조항이 의연히 흔들림 없는 안정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일본 사회
,
일본 시민의 조용하지만 깊은 민주적 저력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처음에는 영국을
,
다음에는 미국을 모범으로 추구했던 탈아입구란
,
실은 절충적 프로젝트였다
.
나를 다 지우고 철저히 남이 될 수 없는 것이다
.
앞서
‘
시간의 동시성
’
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처럼
,
자신을 구성하는 어느 한 시간을 완전히 지워버린다고 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
나를 구성하는 시간이란 항상 복합적이다
.
오늘날 한국과 일본은 분명 중국과 북한에 비해 서구화된 사회다
.
그렇지만 서구화의 한 편에는 영혼을 내다 판 공허와 신경증이 있지만
,
동시에 서구 전통에서의 비판성과 창조성을 흡수해 쌓아 온 축적이 있음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
아울러 그 동안 한국과 일본이 동아시아의 오랜 전통과 문화역량을 몽땅 포기하고 내다버렸던 것도 아니다
.
동아시아 문명전통의 온축을 소중하게 여기고 이를 묵묵히 연찬해 온 흐름들이 양 사회에 공히 강하게 존재했다
.
흑백대립식
,
제로썸식의 동서대립 문명관이 너무나 거칠고 단순하고 빈곤할 뿐이다
.
동남아를 포괄하는 넓은 의미의 동아시아권과 환태평양권의 접면에 위치한 한반도의 위치는 이제
21
세기 문명재편의 시대에 특별히 역동적인 기회를 주고 있다
.
탈아입구의 구호를 국시
(
國是
)
처럼 떠받들어 온 일본에서도 이제 다시 아시아로 들어가자
(
入亞
)
는 취지의 다양한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다
.
세계의 흐름을 볼 때 불가피한 일이다
.
서구권 질서에 오래 편속
(
編屬
)
되어 있었던 일본과 한국이
20
세기 중후반 동아시아의 부흥을 선도하였다는 것도 흥미로운 역사의 역설이다
.
그 토대 위에서 이제 중국의 부상을 계기로 보다 폭넓은 지구적 문명재편의 적극적인 촉매자 역할을 자임해야 할 때다
.
천년에 한 번 올
,
매우 귀한 역사적 호기다
.
동아시아인들이 과거의 낡아빠진 냉전적 이념틀에 붙잡혀 스스로의 발목을 묶는다면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 것이다
.
동아시아 동반 번영의 기틀을 세워야할 이 중차대한 시기에
,
동아시아 내부의 대립과 긴장을 부추기는 것만을 능사로 아는 것은 철 지난 냉전체제의 주인 없는 번견
(
番犬
)
노릇에 불과하다
.
이러한 맹목적 적대감과 단세포적 사고법이야말로 미래에 대한 맹목적 두려움에 휩싸여 있다는 증거다
.
이제
20
세기적 냉전의식을 가지고는
5
대양
6
대주 어디에서도 세계인
,
세계시민의 역할을 할 수 없다
.
한국인은 세계인이 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문명인이 되어야 한다
.
그 시작은 동아시아를 품는 문명적 품을 갖추는 일이다
. (<
맹자의 땀 성왕의 피
>, 591~596p)
현재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정치세력의 진정한 구분선은 좌
-
우
,
진보
-
보수가 아니다
.
공존이냐 냉전이냐
,
평화냐 대결이냐의 가름이 있을 뿐이다
.
이 양 진영이 채택할 수 있는 정책의 폭은 커다란 차이 있다
.
냉전
=
대결 노선의 정책 폭은 공존
=
평화 노선의 정책 폭보다 좁게 마련이다
.
현 정부가 도대체 정책이 있나 싶을 정도로 정책운용의 폭이 좁아진 것은 시대착오적인 냉전파 정치세력의 필연적 운명이다
.
요 근년 지겹게 보아 온 것처럼
,
이들에게 정책이란 오직 반대자들에게
\'
종북
\'
이니
\'
좌파
\'
니 철지난 딱지붙이기 밖에 없다
.
반면 공존파의 정책 폭
,
활동 폭은 넓다
.
정치
,
경제
,
노동
,
고용
,
교육
,
복지
,
국제정치
,
무역 등 모든 영역에서 그렇다
.
자본주의
-
사회주의
,
좌
-
우
,
보수
-
진보니 하는 구분에 구애받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은 무원칙함이 아니다
.
앞서 충분히 이야기해 둔 것처럼
, \'
공존
\'
과
\'
공공성
\'
이라는 원대하고 분명한 대원칙이 있다
.
또 하나 밝혀진 공공연한 비밀이 있다
.
냉전
-
대결 세력 역시 시대의 대세가 공존과 평화로 가고 있음을
(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
알고는 있다는 사실이다
.
그래서 그들 스스로 좌
-
우
,
진보
-
보수를 넘나든다
.
그래서 현 정부가 지난 대선에서 복지국가 공약을 내걸었다
.
물론 선거 끝나면 마치
\'
농담이었어요
\'
라는 식으로 입을 싹 씻는다
.
또 중국과 좋은 관계를 맺어보려고 나름 고민하는 듯하지만
,
귀국 비행기를 타는 순간 마음은
\'
공안정국
\'
과
\'IS
만들기
\'
로 달려간다
.
이들 역시 시대의 대세가 공존과 평화임을 알고는 있지만
,
그 과제를 진심으로 자임하고 수행해나갈 의도는 추호도 없는 것이다
.
다만 기만적으로 상황에 따라 이용할 뿐이다
.
이들의 본심은 항상 냉전과 대결을 부추길
‘
꺼리
’
만을 찾는 데 온통 집중되어 있다
.
문제는 현재의 야권 내부에도 있다
.
스스로 서로 딱지 붙이기 바쁘다
.
그렇듯
\'
가까울수록 의심하고 거부하는
\'
습성은 어디서 왔을까
?
가혹한 냉전 상황
,
독재 하 저항운동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형성된 멘탈일 것이다
.
그들의 의식은 냉전을 벗어났다고 주장하겠지만
,
무의식은 그렇지 못해 보인다
.
아직 냉전 상태고 분단체제다
.
무의식에서는 현 집권세력과 꼭 같은 꼴인 것이다
.
다만 뒤집어져 있을 뿐이다
.
그러나 실제 정치에서는 냉전
=
대결파보다 무능하다
.
활짝 열린 공존체제의 세계상 속으로 힘껏 떨쳐나가 뛰지 못하고
,
좁은 집안에서 아옹다옹 다툰다
.
공존체제는
\'
긴 유럽내전
\'
이후의 세계상이다
.
이런 차원을 제대로 보자면
,
최소한
\'
다른 백년
\'
을 내다보는 시야가 필요하다
.
그러한 시야를 갖춘 정치세력의 국량
(
局量
)
이란 어떠한 것이야 할까
?
최근 좋은 책을 하나 읽었다
.
현재 프린스턴 대학교 명예교수로 있는 위잉스
(
余英時
)
교수의
<
주희
(
朱熹
)
의 역사세계
>
다
.
여기서 위 교수는 우리가 보통 가지고 있던
\'
주자
(
朱子
)=
주희
\'
에 대한 편견을 시원하게 깬다
.
주희는 자기 주장만 내세우는 고집 세고 강퍅한 논쟁가
,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새디스트적 도덕주의자가 아니었다
.
흔히 주희는 적이 많았다고 알려져 있다
.
육구연
(
陸九淵
)
과도 적이요
,
진량
(
陳良
)
과도 적이요
,
섭적
(
葉適
)
과도 적이요 등등
.
철학사적으로 당대에 주희와 같은 급이었던
1
급 사상가들 모두와 주희는 사상적으로 적대했다고 배워왔다
.
이 모두가 침소봉대요
,
그림 전체로 보면 완전히 정반대였음을 위 교수는 밝혀냈다
.
육구연과도
,
진량과도
,
섭적과도 정치적
·
철학적으로 서로 격려하고 지원하는 끈끈한 동지였다
.
철학적 논쟁은 했다
.
제대로 했다
.
그러나 주희
,
육구연
,
진량
,
장식
,
여조겸
,
섭적 모두가 하나의 대원칙을 확고하게 공유하고 있었다
.
황제 전권
(
專權
)
체제에서 군
-
사 공치
(
君
-
士
共治
)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대원칙이었다
.
이 점은 이들의 선배였던 범중엄
(
范仲淹
),
왕안석
(
王安石
)
도 꼭 같았다
.
그러면서 과거 천 년을 보고 미래 천 년을 봤다
.
그런 큰 포부를 공유하고 있었기에 철학 문제에서 논쟁을 하면서 오히려 이를 통해 더욱 강한 유대를 형성해 갈 수 있었다
.
배울 바가 있다
.
[
출처
:
프레시안
브라질 군부독재
vs.
한국 군부독재
,
운명은 왜 엇갈렸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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